아버지가 달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내가 태어난 때 테헤란로(지금의 삼성역)에 서는 통근 버스를 타기 위해 우리 아버지께서는 청담동 AID아파트부터 아침이면 달리기를 하셨다고 했다. 나도 요즘 매일 아침이면 통근 버스가 서는 집 앞의 가락 중학교까지 400 미터 남짓을 달려가는데, 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는 거리. 지금이야 잘 닦인 도로와 넓은 길의 강남이지만, 30 년전 그곳은 밭 두렁 길이었다고 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탕자의 비유” 속에는 또 다른 “아버지의 달리기”가 등장한다. 청년부 박창운 목사님의 말씀 가운데 알게 된 아버지의 달리기 장면은 그 시대의 아버지는 ‘달리면 안되는’ 자리였음에도 행동으로 옮겨진 사실에서 시작한다.

아들의 주장과 아버지의 사랑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재산을 물려받아야 했던 시대에, 자신의 몫을 서둘러 달라고 했던 아들의 이야기는 곧 이미 그 정신속에 “아버지의 사망” 을 의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아들의 요구에 결국 필요한 것을 전해 준 아버지는 이미 이러한 아들의 허랑방탕함을 걱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그를 먼 곳으로 떠나보냈음에도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 마음 한 구석의 아쉬움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행여 언제나 돌아올 수 있을지, 지평선에 해가 떠올라 반대편으로 넘어갈 때까지 아들이 떠난 길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혀야 했을 우리 아버지.

탕자는 다시 돌아갈 면목이 없어 주저 앉았다. 아버지의 종들조차 먹지 않는 것을 먹어가며 그의 옹졸한 자존심을 지켜 내기 위해 애썼다. 그가 돌아가지 못함은 언뜻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미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것을 내어준 그 순간 아들을 용서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갈 용기를 내는 일

아버지로부터 멀어진 마음에 다시 그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는가? 왠지 이제 다시 그 자리에 돌아간다면 호되게 야단을 맞고 꾸지람을 들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는가? 아버지의 사랑을 믿기보다 심판이 두려워 그렇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심판이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아직 늦지 않은 때라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지평선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아들의 모습에, 성경의 표현대로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갔다”. (when he was yet a great way off, his father saw him, and had compassion, and ran. / NKJV)

야단을 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아들의 모습을 바라본 아버지의 속타는 마음은 이내 눈물과 측은함으로 뒤범벅이 되어, 그동안 그를 걱정하며 기다린 시간으로 점철된 과거를 새롭게 하는 잔치를 베풀게 된다. 돌아온 아들에 대한 상급은 바로 그가 스스로 포기했던 그 자리의 “회복” 이었고, 이는 그 집안의 기쁨이요 영광이 되었다.

아버지의 달리기

나를 향한 부모님의 끊임없는 달리기는 그 분들의 멋지고 아름다운 젊음을 소진시켰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미 부모님의 모든 것을 값없이 함께 누리고 있음에도 나는 늘 탕자 처럼 도망가고 싶거나, 이를 시기한 큰 아들 처럼 불만이 많은 상태였다.

지금은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용기를 내어 그 분께 발걸음을 옮겨야 할 때이다. 세상이 약속한 자유는 이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고, 그저 많이 있으면 될 것 같았던 물질과 명예는 우리의 마음을 공허하게 한다는 사실을 왜 인정하지 못하는가. 선한 믿음의 경주,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 속에 오늘도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달리기는 계속되고 있다.

-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