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제대 후 복학한 4 학년. 이전에 받은 학점 좀 고쳐보고, 복학 후 복습도 필요하겠다는 이유로 시작한 2 학년 전공 과목 재수강. 앞에서 강의하시던 교수님은 문득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지금 여러분의 자리와 나의 위치를 서로 맞 바꿀 수만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교실 분위기..
‘세상에.. 그래도 저 분은 젊은 나이에 MIT 박사 (군대도 안 다녀왔다는 소문도..) 에 나름대로 안정적인 정교수의 직함을 갖고 있지 않은가.. 이런 사람이 저런 얘길 하며 은근히 자기 자랑을..’
그래도 교수님의 열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말 바꿀 사람 있으면 나와요. 우리 함께 타임 머신을 만들어 봅시다. 단, 여기 재수강하는 4 학년 학생은 제외하고.”
그게 나였다.
‘그럼 그렇지.. 쩝..’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이제는 이해가 갈만하다. 왜 교수님이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 ‘박하사탕’ 영화 속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돌아갈래~!” 라고 소리쳤던 설경구가 왜 386 세대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이렇게 유명한 배우가 됐는지.
직장에 들어와 소위 “사회인 (or 아저씨..)”으로 행세하기 시작하며, 아직 가까운 친구와 후배들로부터 자주 듣게 되는 말은 ‘돈 벌어서 좋겠다’, ‘학생일 때보다 어느 게 더 낫냐, 단연 직장인..’ 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결코 그들의 짐작대로 대답할 수는 없는 일.
자유와 책임
직장에 들어와서 내 일상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 내게 주어진 “책임이 커졌다”는 것이었다. 이는 인생에 있어 자유의 크기가 극치에 달하는 대학생 시절을 마친 바로 다음 찾아온 것이기에 무게감이 더하다.
생전 보지도 않던 경제 뉴스를 술술 읽어 내려가게 되고, 병원 한 번 가지 않고 나라에 신세질 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도 건강보험료와 세금 올린다고 하면 나도 모르게 분통이 터지는 것. 바로 나도 인정하고, 국가에서도 인정하는 ‘돈벌이’를 시작했음을 알리는 증거다.
“돈 벌기 쉽지 않다” 고 어른들이 누누이 강조했음에도 수 년 간 “과외” 와 “컴퓨터 강사” 같은 이른 바 “알바” 로 레저형 돈벌기에 익숙해진 내게 세상은 감히 ‘금여를 높여 줄테니, 그 만큼 더 해라!’ 는 제안을 걸어 왔다. 이른바, “생계형”. 나의 모든 일상과 활동이 연봉 액수로 평가되는 치열한 물질주의의 터전으로 내 몰린 것이다.
물론 학생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다만 갖고 있는 자유도가 너무도 높아 책임이 그 만큼의 구속력을 가지지 못할 뿐. 수업 땡땡이는 절대 자유지만 정확하고 공정한 평가 시스템이 존재할 때, 이는 매 학기 성적에 대한 책임으로 돌아온다.
직장인에게도 성적표란게 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단언컨대 앞서가는 인적 자원 관리 및 평가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회사는 수 년 내 도태되고 마는 세상. 평가 기준은 학생들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관계의 심리학
학창 시절, 선생님들을 제외하면 하나의 학교 공동체 안에 나타나는 세대 차는 커봐야 10 년. 입사하고 나니, 사장님에게는 이미 나만한 아들이 있고, 매일 얼굴을 대하는 사업부장님은 벌써 입사 20년차를 훌쩍 넘기셨다. 어른을 알고 그 분들을 존중하며, 하나의 조직에서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힘든 상황.
그럼 젊은 회사는 어떨까?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국내 유명 벤처기업에 다니는 동기 녀석은 세간에 잘 알려진 젊은 사장님을 “애 늙은이” 라고 표현했다. 물론 그 친구만의 개인적 편견인지도 모르나, 세상에서 기업의 영향력을 넓혀가고자 한다면 그 조직의 수장은 나이가 젊더라도 적당히 ‘늙어 보여야’ 하는게 필요해 보인다.
이러한 어른들에게는 “순종”과 “배움”이 미덕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존감이 강한 청년들이 많은 이 때에, 많은 기업들이 그들의 인사 기준으로 아직도 조직에의 충성도와 조직 내에서의 성실함을 최 우선 순위로 두고 있음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대학에 입학할 때야 성적순으로 줄을 섰지만 나와 함께 동고 동락할 동아리 후배를 평가할 때에도 그랬던가? 이미 서류 전형을 마쳤다면, 실력은 대동소이하다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직무적성검사와 면접을 계속 치루는 건, 과연 이 친구들 중에 ‘우리 기업(입맛)에 맞는 사람이 누구인지, 함께 일할 만한 녀석이 누구인지’ 를 찾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이태백, 그대의 낭만이 바로 핵심 경쟁력이다
행여 아직도 자기가 가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서도 공부한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이들에게, 감히 순진하게 재수없이-휴학없이-대학원진학없이-군대만 다녀와서 바로 입사한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그대의 낭만을 최대한 누리라” 는 것이다.
나는 이태백이 메뚜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일을 향한 준비없이 그냥 막연히 누리는 여유라면 그것은 ‘낭만’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며, 세상을 향한 준비를 더 할 수 있는 기회이고, 조금 늦더라도 더 큰 흐름에서 시작하겠다는 정상을 향한 발걸음이다.
부러운 학생들이여, 그대들의 배움에 정진하고 철저히 자유를 즐겨라. 직장에서 배우게 될 다른 세상 일들에 맞서 잊혀지지 않을 자기의 주무기를 단련하라. 그대들이야 말로 모든 직장인들이 부러워하고, 가고 싶은 바로 그 “시대”를 살고 있음을 알 수 있길.
‘언제나 행복 속에서…’ 용진
-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