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의 이름 두 글자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움찔’하게 되는 건, 그의 강직한 품성만큼이나 그에게 더한 지식의 깊이가 경이롭기 때문이다.

도올 도사님

언제부턴가 그가 우리집에서 구독하는 일간지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를 좇아다니며 글을 쓰는 ㅡ 아니면 ‘써달라’고 하는 ㅡ 기자가 있는 것처럼 그의 직간접 출현은 유독 이 일간지에 빈도가 높다. 이 기회에 냄비세트와 부르스타에 3개월 무료 구독을 권한 다른 일간지나, 보다 유용한 경제지로 바꿀까.. 고민하던 찰나. 오히려 ‘정면대응’[열독]키로 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 98년 월드컵 예선 즈음. 경기 전에 늘 기도하며 승승장구하던 차범근 감독에게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셨다”는 글로 나무랐던 그의 칼럼이 계기가 됐다. (당연히 좋은 인상일리 없지.!) 이어서 잠깐 공중파 TV에 출현하여 답답한 국민들 마음 속을 논어를 빌어 긁어주던 그를 만났는데, ‘참.. 똑똑한(!) 사람이구나’란 생각이 잠시.

아숩..다

본의 아니게 열심히 읽게 된 그의 이야기와 관련 기사를 보면 여전히, 아니 이전보다 더 강하게 기독교는 ‘종교’임을 외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이기에 그럴듯한 설득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없다. 제대로 믿지 못한다는 비판,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만들지 못한다는 비판, 세계의 흐름을 선도하지 못하는 우리에 대한 비판은 그에게 넘치는 지식만큼 강렬하지만.. 적어도 그에게 세상의 주관자시요, 불꽃같은 사랑의 주 예수는 없다.

그를 위해 기도하기

나는 그가 보다 많은 신앙적 경험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말로 대응할 수 없지만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 적어도 내가 믿는 주님은 최근 그가 연재하는 “도마 복음”의 저자가 경험한 것처럼 실제적인 이들에게도 그에 맞는 사랑을 보이시는 분이기에.

나는 그가 더 이상 지식의 수평적 나열로 한 곳만을 바라보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판에만 익숙한 그의 모습과 또 새로운 지식이라며 들이대는 그의 호쾌함에 사람들은 고정되기 시작했다. 그가 나가는 방향은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가 무엇에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참된 깊이와 무게가 더해진 ‘고백’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길. 위해 기도할 것이다.

[正面對應]
중앙일보, “도올 고함(孤喊)”
중앙SUNDAY,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기도는 골방서 하라셨다”, 중앙일보 발언대 기고문, 1997. 10. 23.

‘언제나 행복 속에서…’ 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