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수요일 밤. 아내와 함께 교회 청년부 리더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다 집 앞 사거리에 신호를 기다리며 멈춰섰다.

"여보, 혹시 독립문에 대해 알아?"
"그러게, 막상 독립문에 산다고 하면서도 도대체 저 문이 뭔지 모르겠네.. 파리 개선문을 본딴 것이라고는 하던데 말야.."

불과 백 여년 전

그래서 얼른 찾아본 독립문의 역사. 회사 점심 시간에 Wikipedia로 넘나 든 페이지가 족히 10개는 더 됐던 것 같다.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 불과 백 여년 전에 일어난 우리 민족의 흥망사의 현장이 바로 내가 사는 곳과 매일 출퇴근하는 길에 펼쳐져 있었다니.

홍제역을 아는가. "홍제원"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사신들이 묵던 국가에서 운영하는 여관이었다. 지금의 홍제역 사거리 ㅡ 지금도 간혹 '홍제원 사거리'라고 불리는 ㅡ 근처 언덕에 홍체천을 내려다 보고 지어져 그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중국 사신은 이 곳에서 긴 여행길을 마무리하는 하룻밤을 보낸 뒤, 자신의 관복으로 갈아 입고 다음 날 "영은문"으로 향했다. 지금 내가 사는 곳, 독립문이 세워진 사거리가 바로 여기다. 애석하게도, 우리 조선시대의 왕들은 궁궐을 나와 직접 이 곳까지 와서 중국 사신들을 맞이했다.

서재필

우리 근대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인 "갑신정변". 개화기에 일본의 선진 문물에 관심을 갖고 있던 김옥균을 비롯한 사람들이 지금도 이대 후문 쪽에 위치한 "봉원사"에서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나라의 새로운 체계를 세우겠다며 일으킨 정변이었다.

이후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난 당시 정변의 무리 중에 군대를 관장하는 막내로 서재필 선생이 있었다. 그는 정변 이후 일본으로 도피, 그곳에서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미국으로 다시 떠나 성공적인 이민 생활을 정착한 첫 번째 우리나라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다.

십 여년 후, 우리나라는 다시 서재필 선생을 이 땅으로 불렀고 그는 일찍이 외세(일본)에 의존해 일으켰던 갑신정변의 실패를 교훈삼아 철저히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잘 알려진 독립신문의 창간ㅡ적어도 내게 그는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과 흡사한 인상이다ㅡ과 함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바로 지금의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영은문의 기둥 두 개는 사료 보존을 위해 남겨졌다고 하는데, 지금 독립문 앞에 놓인 두 개의 기둥이 그것이 아닐런지 내심 추측해 봤다.

독립문, 그 이후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독립문의 현판처럼 새겨진 글씨를 당시 이완용이 작성했다는 것. 불과 몇 년 후 그가 치욕의 사건이 된 한일합방조약의 주동자로 낙인 찍혀서인지, 지금도 독립문의 역사적 가치는 현대에서 잘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다.

서재필 선생은 당시 지속적으로 "자주, 독립"의 정신을 외치다 다시 미국으로 쫓겨가게 된다. 이후 그는 한국인 최초로 서양의사 면허를 취득함은 물론 미국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내가 지금 사는 현저동은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를 내려다 보는 안산 동편 언덕에 있다. 요즘 독립문 공원 확장 공사가 한창인데, 사실 독립문 사적 자체에 대한 관리는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이 담배불을 비벼 끄시는 장면이 보일 정도로.. 무척 개방적(?)인 편.

이야기가 길었지만 덧붙여 길 건너 재래시장인 영천시장의 정겨운 모습과 아직도 60-70년대 모습을 간직한 골목과 상점들의 모습을 사진첩에 더해본다.

참, 그리고 이진아 기념도서관에서 책도 한 권 빌렸다. "서재필, 광야에 서다". 독립문의 역사를 들춰보다 모처럼 흥미로운 역사 속 위인 한 명을 마주한 것이 내게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언제나 행복 속에서...' ~~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