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 이름만으로도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시는 분. 대학 진학 이후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되뇌이게 되는 그 이름, 아버지.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위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개인적인 ‘내 아버지’ 에게는 이런 특별함이 있다.
지금도 곁에서 아버지 자랑을 하시는(?) 할머니의 말씀을 옮기면, 아버지께서 중학교를 다닐 때에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면담 요청이 들어왔다고 한다. 시험을 봐서 진학하던 고입 문제와 관련한 상담이었는데, 할머니께서는 우수한 성적의 아버지를 일류고에 진학시키고 싶다는 담임 선생님의 의지를 Mission School 인 “대광고등학교”에 보내겠다는 바램으로 무력화 시키셨다고 한다.
할머니를 설득하다 지친 선생님은 이내 할아버지를 오시게 하셨는데 아마도 ‘어머니와는 말이 안통하니, 아버지와 얘기해 보겠다’는 심산인 듯 보였다고 하신다. 그러나 우리 할아버지.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아버지를 대광고에 보내겠다고 하셨단다.
그렇게 아버지의 학창 시절은 이어져 연세대 경영학과 4년, 군대 3년 (더하기 김신조 일당이 제대 1 주일 전 난동을 부려 몇 개월 더 하셨다는..) 그리고 신학과 4년 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어서 삼성에서의 30 년 가까운 직장 생활..
내가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께서는 오랫동안 본인이 간직해 오신 1972년의 삼성 그룹 뱃지를 전해주셨다. 바로 아버지께서 신입 사원 연수를 마치시고 비서실(지금의 구조본)에 배치되시던 날 가슴에 달은 의미있는 것인데, 이제 아들이 그 직장을 섬기게 되었다며 축하해 주신 것이다.
솔직히 내가 아무것도 모를 때는 아버지를 보며 ‘저런 월급 쟁이는 되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매일 새벽 같이 나가시고 밤 늦게 들어와 다시 새벽같이 나가시고.. 주말에는 교회 봉사에 선교 활동에 정신이 없으시고.. 그나마 주일 저녁 가족 식사와 예배 때 잠시 얼굴 뵙고 다시 아버지의 새벽 깨우기가 시작되셨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런데 내가 대학입시에서 실패 아닌 실수를 그냥 받아들일 때 즈음, 아버지께서도 본인 모교의 경영대학원에서 대학원생이 되시더니.. 그 바쁜 일상에도 너끈히 석사 학위를 받으시는게 아니던가. ㅡ 아버지 심부름 도중 우연히 보게 된 아버지 성적평점은.. 당시 내 평점 곱하기 2 는 됐을게다..(믿거나 말거나지만) 충격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 이듬해 나는 군에 입대한다. ㅎㅎ..
아버지의 퇴직과 새로운 길
정든 직장을 떠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당시 편했던 내 군 생활 덕분에 옆에서 보게 됐던 기억이 있다. 오랜 직장 생활의 산실인 아버지가 지으신 사내 교육 책자들과 잘 정돈된 서류들.. 무거운 그것을 하나하나 집으로 옮겨 오시며 아버지는 익숙해진 자리에 대한 미련도 하나 씩 내려놓으시는 것 같았다.
그룹 신입 사원 교육을 도맡으시며 젊은 사원들과 함께 하기를 즐기셨던 아버지의 소망은 퇴임 이후에도 이어져, 같은 해 숭의여대 교수로 임명받아 교단에서 젊은 청년들과 시간을 계속 함께 하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끝이 없었다. 석사학위를 받으시자 마자 이내 박사공부를 시작하셨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때 아버지 나이 56 세. 도대체 무엇을 이유로 그리도 공부를 붙잡으신 건지.. 당시 어머니 말씀, “우리 집엔 나 빼놓고 다 학생인데, 그 중에 제일 나이 많은 학생만 공부 열심히 한다” 고.
연변 과기대와 아버지의 Vision
아버지는 평안북도 선천이 고향이시다. 얼마 전 용천역 폭발 사고가 일어난 경의선 철도의 한 정거장 앞이 바로 선천. 힘들게 모으신 재산을 다 버리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 내려오신 이곳에서도 아버지는 유년기 때 고향의 한 언덕에서 언덕 밑 터널로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셨다며 종종 그곳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곤 하신다.
만 60 세. 불혹의 나이와 지천명을 거쳐 이순의 경지에 이르신 아버지의 비전은 바로 “북한” 에 있었다. 박사학위 수여식을 앞두고 아버지는 평소와 다름 없이 소박한 웃음을 지으시며 둘러앉은 식구들에게 “연변 과기대에 가게 됐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아버지로부터 그 말씀을 듣게 되니 가슴 한 편이 시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들된 몫을 미처 해 내기도 전, 그렇게 부모님은 북한 보다 더 북쪽의 그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가셨다. 교회 안의 소란스러움과 육신의 건강에 대한 우려도 “오직 기도만이 해답”이라고 하시던 아버지의 조용한 목소리를 지금도 기억한다.
“연변 과학기술대학교, 김성준 교수님 앞”
아버지께 보내드릴 우편물에 영어와 중국어로 학교 주소를 적으며, 마지막에 우리말로 큼지막히 자랑스러운 아버지 직함을 새겨 넣었다. 비록 이제 가까이에서 늘 뵙지는 못하지만 난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
지금도 내 곁에서 살아 있는 갈렙으로, 믿음의 용사로 서 있는 아버지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그 무엇보다 크고 놀라운 은혜로 함께 거하고 계심을 확신한다.
여호수아 14:6b~14 - 표준새번역(개정)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주님께서 나와 당신에 대하여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알고 계십니다.
내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에, 주님의 종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그 땅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돌아와서, 내가 확신하는 바를 그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나의 형제들은 백성을 낙심시켰지만, 나는 주 나의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따랐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날 ‘네가 주 나의 하나님께 충성하였으므로, 너의 발로 밟은 땅이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유산이 될 것이다’ 하고 맹세하였습니다. ”
“이제 보십시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 일을 말씀하신 때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하며 마흔다섯 해를 지내는 동안,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나를 살아 남게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이제 나는 여든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나를 정탐꾼으로 보낼 때와 같이, 나는 오늘도 여전히 건강하며,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힘이 넘쳐서, 전쟁하러 나가는 데나 출입하는 데에 아무런 불편이 없습니다. ”
“이제 주님께서 그 날 약속하신 이 산간지방을 나에게 주십시오. 그 때에 당신이 들은 대로, 과연 거기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은 크고 견고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는 그들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축복하고, 헤브론을 유산으로 그에게 주었다. 그래서 헤브론은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유산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른다. 그것은 그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따랐기 때문이다.
- 終 -